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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회의] 왜 동물보호법 전면개정 프로젝트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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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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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동물보호법 전면개정 프로젝트를 하는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해야 할 일을 열거해 봅시다. 도덕적 의무라고 해도 되겠지요. 첫 번째 위치에는 무엇이 놓여야 할까요? 저는 고통을 느끼는 존재들에 대한 학대를 없애는 것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동물에 대한 학대를 없애야 합니다. 동물학대, 아동학대, 노인학대, 장애인학대 등 여러 학대 중에서도 실험동물과 축산동물 등 동물을 향한 학대는 그 규모에 있어서 다른 학대에 비할 바 없이 크므로 그 방지를 위해 각별한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이는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직관적으로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동물학대 문제가 왜 가장 중요한 도덕적 주제인가? 그것이 인권 문제와 기후위기보다 왜 더 중요하단 말인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도덕이란 것에 대해 짧게라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덕이란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가치있다고 하는 가치 판단의 일종입니다. 도덕적 판단은 관습적인 차원도 있고 이성적인 차원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논의를 전개하는 토대는 이성적 차원의 도덕입니다. 이성적 차원의 도덕이란 공평무사한 도덕을 말합니다. 공평무사함을 견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인간중심적인 관성입니다. 인간이 인간중심적인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당하다고 할 수 없고 불가피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평무사함을 저해하는 인간중심성은 그런 것이 아니고 도덕 문제를 추론함에 있어서 인간중심성으로 인해 빚어지는 비합리성입니다. 후자의 인간중심성은 주의를 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주의력을 잃는 순간 그 속으로 빠져듭니다. 스스로 생태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스스로 신유물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스스로 동물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인간중심성으로 인해 합리적 추론에 실패합니다.

 

도덕이 가치 판단의 일종이라고 했는데 도덕적으로 무엇이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먼저, 자연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자연이란 사람과 사람의 행위를 포함하여 우리가 상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자연은 훼손되거나 파괴되거나 멸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훼손하고 파괴하고 멸망시켰다 해도 그 결과는 여전히 자연입니다. 따라서 자연 그 자체는 보존을 위해 노력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연의 보전이나 증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따라서 도덕적 고려에 있어서 자연은 우리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자연은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를 가지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자연이 보존할 대상이 아니고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인간은 자연의 A라는 상태를 자연의 B라는 상태보다 더 선호하면서 말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소중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보기 좋고 유익한 자연을 예찬하는 것은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보기 싫고 유해한 자연도 자연입니다. 플라스틱도, 쓰레기도 자연입니다. 개념 상 자연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언어를 구사할 때는 인간에게 친숙한 자연상태A를 자연과 등치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언어사용이 개념과 다른 인간중심성입니다.

 

자연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고 해서 우리가 자연을 함부로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연의 각 부분은 역능이 있어서 전체로서의 자연의 변화에 대한 영향이 인간의 영향보다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유물론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자연의 역능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엉뚱한 함의를 끌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물의 역능이 직관적으로도 드러나는 특수한 사례들을 보여 주면서 인간의 동물해방운동을 폄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다수 동물들은 인간의 통제 하에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죠.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여하튼 자연의 역능성으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결론은 자연의 각 부분은 인간이 행위를 함에 있어서 매우 까다로운 대상이고 제약조건이며 따라서 우리는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세상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을 위해서 그러해야 합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던지는 가장 큰 도전은 무상함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언젠가 없어질 것이고 이 우주조차도 없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이룬다고 해도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없어질 것입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의 각 부분의 무상과 무아를 생각해 보면,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이 순간, 자아라는 이미지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상태, 이러한 종교적 경지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만약 인간에게 궁극적인 의미가 있는 무엇이 있다면 여기에 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은 생존과 생활의 불가결한 조건입니다. 인간에게 도구적 가치가 참으로 큽니다. 덧붙여, 자연은 인간에게 신중한 태도와 지금 이 순간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을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자연이 내재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 역시 그 자체는 가치가 없습니다. 피터 싱어가 지적한 것처럼 사람들은 생명이 귀중하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 사람들이 생명이라고 말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다른 동물의 생명이 함부로 다루어지는 것을 볼 때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생명 역시 위협에 노출된 기분이 듭니다. 이런 기억이 생명은 소중하다는 말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인간과 많이 다르게 생긴 식물이 낫에 베어나갈 때는 그런 위협감을 느끼지 않고 그런 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식물에게도 생명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고기를 먹습니다. 고기 먹는 사람이 생명이 소중하다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을 보면 이상합니다. 그리고 비건조차도 식물을 먹음으로써 생명을 없애는 행위를 수요합니다. 이 수요을 통해 생명을 없애는 행위의 절반을 담당하면서 자이나교인들 등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신들의 행위를 부도덕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수 인간들의 이러한 생명경시는 도덕적으로 타당합니다. 생명이라는 자연현상이 비생명이라는 자연현상보다 가치 있다고 볼 수 있는 어떠한 설득력 있는 이론도 제시된 바 없습니다. 물론 생명은 비생명보다 더 희소한 현상이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신중함의 관점에서 보면 더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돌보다 핸드폰을 더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과 같은 원리이며 생명이 내재적 가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 생명이 있어야 삶이 있는 것이니 삶 그 자체가 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생명은 소중합니다. 물론 이 때의 소중함은 삶을 위한 도구로서의 소중함입니다.

 

자연이나 생명에 내재적 가치를 부여하는 이론을 개발하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이에 비해 동물은 내재적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물은 일반적으로 이동을 하는 생명체로서 신체의 통일성이 고도로 보장되어 있는 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경계입니다. 이러한 신경계를 통해 넓은 의미에서 자기의식이 형성되고 쾌고를 느끼게 됩니다. 이 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한 도구적 가치가 아닌 자신(self)에게 자신이 가치를 가지는 상태 즉 내재적 가치가 생성됩니다.

 

자신이라는 주관적 상태가 형성되어 자신에게 자신이 가치를 가지는 상태는 내재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충분조건입니다. 자신이라는 주관적 상태가 형성되어 자신에게 자신이 가치를 가지는 것이 객관적으로 인정될 수 있다면 그 대상에 대해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반이성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을 포함한 동물에게 일반적으로 내재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이라는 개념이 앞에서 말한 자아와 본질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무아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자신 역시 집착할 바는 아니나 무아는 종교적 경지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도덕에 대해 전제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도덕 공동체는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동물들의 왕국입니다.

 

철학자 제레미 벤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 아닌 동물이, 폭군이 아니라면 누구도 빼앗아 가지 않을 권리를 획득할 날이 올 지도 모른다. 프랑스 사람들은 피부가 검다는 것이, 한 인간에게 제 멋대로 고통을 주고도 배상 없이 방치해도 되는 이유가 못 된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다. 다리의 숫자, 피부에 털이 많음, 꼬리뼈의 말단이, 감각이 예민한 존재를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해도 되는 이유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외에 무엇이 누군가의 권리를 평등하게 배려할 지 여부를 나눌 경계선이 되겠는가? 추론하는 능력인가? 또는 대화하는 능력인가? 그러나 충분히 성장한 말이나 개는 갓난 아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합리적이고 말이 더 잘 통한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문제는 사유할 수 있는지 또는 말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Jeremy Bentham, “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벤덤이 말한 느낀다는 것은 자신이 발현되는 것과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사람 아기가 자신의 발가락을 깨물고 아파서 울 때, 저 곳에 있는 발가락이 나의 일부라는 이미지를 형성하지 못했다 해도 이미 그 자리에는 주관이 있어서, 전 신체를 통일체로 대하는 자신이 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느끼는 존재라는 개념을 전제하여 구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면, 예를 들어 지각과 연산 능력만 갖춘 로봇이라면 인권이라는 개념도, 인권 주장도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을 포함하여 동물들을 느끼는 존재로서 대하는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문제보다 더 근원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더 중요합니다.

 

근대시민혁명과 그 후 긴 시간 사회변화를 통해 인권은 한 사회의 근본 가치로 자리잡았습니다. 비록 많은 빈 곳을 안고 있다 해도 과거 노예에 비하면 그러합니다. 누구도 공공의 공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비인간동물은 해방을 위한 혁명의 문턱을 넘지 못했고 시민이 아닙니다. 이 혁명은 인간을 포함하여 동물들을 느끼는 존재로서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권의 빈 곳을 채우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을 느끼는 존재로 대하는 태도는 비인간동물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인간을 향한 태도에도 스며들게 됩니다.

 

기후위기는 어떤가요? 기후위기, 더 크게 지속가능성 문제는 살 만한 세상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대동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축산동물에게, 그리고 수많은 실험동물에게 세상은 살 만한가요? 비건이 아닌 사람 중에서도 먼 미래에는 축산업이나 동물실험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사실 축산동물이나 실험동물 입장에서 보면 지금 당장 자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이 중단되는 것이 더 이익일 것입니다. 결국 생태를 이야기하고 조그만 얼음 위에 서 있는 곰이나 쓰레기 통을 뒤지는 곰 영상을 보여주지만 그냥 인간중심성의 포장일 따름입니다. 요즘 유행처럼 동물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나오지만 그런 이야기와 책이 정말 동물을 위한 이야기인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여하튼, 인간을 포함하여 동물들을 느끼는 존재로서 대하는 문제는 인간만을 고려하는 기후위기 문제보다 더 근원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더 중요합니다.

 

동물들을 내재적 가치를 가지는 느끼는 존재로 대한다면 인간이 첫 번째로 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들에게 고의적이고 심각한 고통을 가하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즉 학대를 멈추는 것입니다. 동물을 죽이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이론적으로 검토될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비건이 극소수인 지금의 현실에서 동물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동물학대는 우리 이웃에 있는 동물, 축산시설에 있는 동물, 실험실에 있는 동물, 기타 동물들에게 가해지고 있습니다. 매우 고통스러운 축산시설과 심각한 고통을 겪는 실험과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것을 제지하는 법은 사실상 없습니다. 반려동물을 유기하고 반려동물이나 길고양이에 대한 직접적 학대도 만연하지만 법은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지 못합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러나 달라질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동물보호법이 개정되어 왔지만 학대가 심각해지는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케어는 동물의 삶이 심각한 주제라는 인식을 가지도록 20년 간 학대현장을 가서 폭로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동물학대 현장에 늘 머무르며 얻은 깨달음과 몸에 베인 절실함으로 이제 동물보호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하고자 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가 하여야 합니다. 극도로 고통스러운 동물의 삶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집중력, 비판정신, 끈기를 가져야 합니다. 3, 같이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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