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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운동 칼럼>

- 삶과 죽음 -


“저 동물을 구조하여 지자체 보호소로 가면 안락사가 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매일 입씨름이 벌어진다.


이 문제에 대한 좋은 답을 얻기 위해 몇 개의 생각 단계를 가 보자.


1. 먼저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 문제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누구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볼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사는 존재는 동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물은 보통 동물계, 식물계, 균계, 원생생물계, 세균계, 고세균계로 분류된다. 균계에 속하는 버섯의 입장에서 사는 것은 가치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말해,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지를 자연의 입장에서 볼 수는 없다. 돌이나 철의 입장에서 중력이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거나 1000도 이상의 고온이 자신에게 마이너스의 가치를 가진다거나 하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돌과 철이 중력과 고온에 반응하지만 그 반응을 보고 그 자연물의 입장에서 무엇이 가치가 있고 무엇이 가치가 없고를 정할 수는 없다. 곰팡이나 양파 역시 마찬가지다. 곰팡이가 주변에 수분이 많아서 생장이 잘 되고 수분이 없어서 생장이 억제된다고 해서 그러한 반응이 곰팡이에게 수분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없는 존재의 입장에서는 가치 있는 것도 없고 가치 없는 것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느낌’ 또는 ‘주관적 경험’이다. ‘마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철학자들끼리 극단적으로 대립하지만 적어도 이 마음이라는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생물의 진화과정에서 신경이 생기고 복잡해져 ’뇌나 적어도 신경절(ganglion)이 있는 동물’(이하 ‘동물’)이어야 마음이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마음이 있는 동물에게만 의미가 있는 질문이다.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생명이 만약 소중하다면 그것은 동물에게만 해당하는 말이고 동물에게만 생명이 소중할 수 있다는 것은 생명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동물이 동물 아닌 생명체와 구분되는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성은 곧 마음이다.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제는 곧 동물의 마음에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2. 마음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좋음 또는 나쁨이라는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가 동물보호운동을 한다는 것은 사회를 변화시켜 인간의 행위로 인해 동물의 마음에 ‘나쁨’이라는 현상이 발생할 확률을 줄이는 것이다. 축약해서 말하면 동물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좋음’이라는 현상이 발생할 확률이 늘어나게 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런 발상은 현재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고 있는 끔찍하고 거대한 고통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커서 권하고 싶지 않다. 동물운동가는 같은 이유로 ‘동물보호를 넘어 동물복지로’라는 말을 싫어한다.


이제 동물의 마음에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 또는 죽음은 마이너스의 가치를 가지는가라는 문제를 보자. 죽음에 이르는 경험은 죽음의 형태에 따라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전기봉을 입안에 넣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먹을 것을 찾아 해매다가 결국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세 경우 모두 죽음에 이르는 경험이 있는 것이지 죽음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삶이 끝났다는 사실일 뿐 경험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고 그 자체는 플러스든 마이너스든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의 가치에 대해 간접적 평가는 가능하다. 동물의 마음에 사는 경험이 좋은가 나쁜가에 따라 좋은 삶을 종식시켰으면 마이너스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고 나쁜 삶을 종식시켰으면 플러스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3.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삶을 0, 최상의 삶을 10이라고 할 때, 현재 당신의 삶은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사람들은 다양한 수준의 답을 한다. 점수가 가장 높은 국가인 핀란드 국민은 평균 약 8점의 답을 하고, 60위쯤 하는 한국은 평균 약 6점의 답을 하고 가장 점수가 낮은 아프카니스칸 국민은 평균 약 2점의 답을 한다. 


여기서 인간은 왜 극단적으로 비참한 삶을 겪으면서도 삶을 유지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인간은 고유하게 자살능력이 있다. 다른 동물에게도 자살처럼 보이는 현상은 나타나나 죽음을 목표로 한 행동이 아니어서 자살능력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정말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자살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물학은 인간에게는 시간적 자아(autobiographical self)와 그 보존의 욕구가 있다고 설명하고, 상식은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감과 나은 삶이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설명한다.


그러면 이 모든 이유가 없는 동물은 비참한 삶을 왜 유지해야 하는가? 


4. 동물이론에는 ‘살 가치가 있는 삶’이라는 개념이 있다. 영국농장동물복지위원회(FAWC)는 2009년 제출한 보고서에서 ‘좋은 삶’(a good life) 개념과 함께 살 가치가 있는 삶‘(a life worth living) 개념을 제시했다. 동물의 마음에 ’좋음‘이 ’나쁨‘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삶이 ’좋은 삶‘이라면 ’좋음‘이 ’나쁨‘보다 약간 많은 삶이 ’살 가치가 있는 삶‘이다. 삶에서 나쁜 경험이 좋은 경험보다 더 많다면 살 가치가 없는 삶이다. 인간은 가축을 살 가치가 없는 삶의 상태에 둔다. 유발 하라리는 공장식 축산을 역사상 최악의 범죄라고 말했다.


개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밭지킴이 개(분리사육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들은 폭염, 혹한, 재난 상황, 위험한 물건, 모기와 진드기, 비위생적인 환경, 다른 동물의 공격, 고립으로 고통과 만성적 스트레스,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만성적 스트레스는 면역기능 저하, 소화기능 장애, 피부 질환, 불안, 공포, 우울을 유발한다. 이들은 거의 매일 고통이 좋은 경험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삶을 살고 있다. 밥을 받고 짧게 관심을 받는 순간이 있더라도, 전체 삶의 구조는 고통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런 삶은 ‘살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니다.


5. 많은 동물이 살 가치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살 가치가 있는 삶, 나아가 좋은 삶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국민이 원하지 않는 것이다. 동물에게 살 가치가 있는 삶을 제공해 줄 동기가 없는 자본, 고통을 겪다 고통스럽게 죽은 동물을 소비하는 소비자와 개의 고통에 무관심한 견주, 이런 부당한 사태를 용인하는 공무원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앞에서 동물운동에 대해 말하면서 ‘나쁨’을 감소기키는 것이라 하고 ‘좋음’의 증가라고 하지 않은 것은 국민의 이런 상태를 은폐하기 싫어서이다. 


동물운동은 이들 전체와 싸우는 것이다. 싸우는 전략은 이 학대의 사슬에서 약한 고리를 치는 것이다. 약한 고리를 치면서 이 고리가 전체 사슬의 일부에 불과함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여기서 약한 고리는 수십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개의 고통에 무관심한 견주이다. 분리사육견 뿐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경우에도 동물을 그 자체로서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귀여움의 소비 등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해 기르는 사람들이다. 이 글의 시작 부분에  제기되었던 “저 동물을 구조하여 지자체 보호소로 가면 안락사가 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바로 이 견주와의 싸움에서 나오는 문제다.


6. 이 견주와의 싸움은 많은 경우 개의 구조를 수반한다. 개를 구조하면서 학대가 마음 아파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 해결하여야 할 문제임을 분명히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구조견에게는 살 가치가 있는 삶, 더 좋게는 좋은 삶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동물운동이 완결적으로 이 과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동물운동은 기본적으로 전사의 집단이고 구조된 개체에 투여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기 때문이다. 입양자, 임시보호자, 봉사자와 대부모, 후원자가 활성화되지 않으면 어렵게 구조된 소수의 개들조차 다 보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입양자와 임시보호자를 못 만나고 공간과 자원의 부족으로 살 가치가 있는 삶을 제공받지 못하는 개는 안락사가 최선의 해법이다.


죽일 것을 왜 구조했느냐고? 첫째 학대받으며 사는 삶은 죽음으로서라도 끝내는 것이 그 개에게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구조를 통해 살 가치가 있는 삶, 좋은 삶을 살 확률이 약간이라도 생기기 때문이다. 셋째 구조가 학대자와의 싸움의 본질적 구성요소 중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공간 부족을 사유로 안락사한 것을 유죄 처분한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은 상을 주어야 할 곳에 벌을 내린, 그리고 그 영향이 동물보호와 인류문명 발전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친 매우 잘못된 행위이다. 그 잘못의 책임이 사법부에 있든, 입법부에 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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