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어와 동물운동은 늘 길 위에 서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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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어 홈페이지에는 실화탐사대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 ”[성명서]언론인들께 보내는 한 동물운동가의 호소“라는 글이 있습니다(활동->보도자료). 그 글에는 동물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동물운동에 대해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동물운동단체에 대해 입을 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나다.
동물운동을 이해하는 데에는 사회운동 중에서 이미 알려진 유사한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동물운동은 예수운동과 유사합니다. 이른바 당사자 운동이 아니고 ‘순수 이타성이 이념’이라는 점과 활동형태가 ‘비정주성-유랑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양자는 유사합니다. 온 천지에 고통스러운 이들이 퍼져 있다면 순수 이타성이 유랑으로 나타나는 것은 필연입니다. 예수운동의 ‘비정주성-유랑성’을 살펴봅시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신약성경, 마태오 복음서, 8장 20절 중)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200주년기념성서, 마르코의 복음서, 10장 17~21절 중)
예수는 집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분은 정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계속해서 걸으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유대 땅으로, 다시 이방 땅 티로와 시돈으로.
그분은 길 위의 사람이셨습니다. 그 길은 단지 발걸음이 닿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고통을 따라가는 사랑의 경로였습니다.
머무름은 곧 체제 속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권력과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착은 배제의 구조를 만듭니다. 집을 짓는 순간 우리는 안과 밖, 우리와 저들, 깨끗함과 더러움을 나누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 담장을 허무셨습니다. 정결하지 못한 자, 이방인, 창녀, 세리… 그들은 예수께서 걸어간 길 위에서 만난 이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곳, 인근의 작은 읍들을 찾아갑시다. 거기서도 나는 복음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사실 나는 이 일을 하러 떠나왔습니다."(200주년기념성서, 마르코의 복음서, 1장 38절 중) 하느님의 나라는 한 곳에 머무는 안식처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걷는 사랑의 여정 속에 있습니다.
동물운동이 바라보는 예수는 정주한 예수가 아니라, 유목하는 예수입니다. 길 위에서 만난 고통을 지나치지 않으셨던 예수,
병든 자의 부르짖음에 발걸음을 돌리셨던 예수, 성전이 아니라 시장과 광야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
동물운동도 그러해야 합니다. 길 위에 서야 합니다. 안전한 집에서, 불편한 연대로.정착한 집에서, 떠나는 사랑으로.
케어와 동물운동은 늘 길 위에 서고자 합니다. 학대받는 동물을 끊임없이 찾아나섭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동물과 동물운동을 위해 다 사용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념과 현실은 같지 않습니다. 예수의 남자 제자들은 전부 배신을 때렸고, 심지어 예수를 팔아넘긴 자도 운동의 내부인이었습니다. 예수운동이 그러했듯, 케어의 실상이 순수 이타성이 아니고 순수 유랑성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동물운동과 케어가 추구하는 이념임은 분명합니다.
- 다음글언론인들께 보내는 한 동물운동가의 호소 25.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