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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언론인들께 보내는 한 동물운동가의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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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들께 보내는 한 동물운동가의 호소

- 동물 파양 사건을 다루는 MBC ‘실화탐사대’의 취재방식 비판 포함 -


동물운동가 김영환(케어 대표)



목차


머리말

박대송 사건

동물의 삶에 대해

동물운동에 대해

맺음말



머리말


박대송은 대구 수성구의 아파트에 살다가 다른 집의 마당으로 쫓겨났던 한 시바견의 이름입니다. 반려인이 이 개를 쫓아내면서 입에 담지 못할 조롱을 본인의 SNS에 올림으로써 많은 시민들이 격분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하는 MBC ‘실화탐사대‘의 인터뷰에 응하면서, 동물관련 사건을 다루는 언론이 동물의 삶과 동물운동에 대해 숙고하지 않음을 느낀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 배경입니다. 그러나 동물운동가로서 언론인들게 동물의 삶과 동물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가족을 잃고 마을을 떠돌던 발바리 푸딩이를 구조하자 수많은 언론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많은 기자들이 “왜 푸딩이를 구조하셨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가벼운 질문에 대해 저는 “제가 푸딩이를 구조하지 않았으면 기자님이 저에게 연락을 했겠습니까”라는 도발적인 대답을 내놓곤 하였습니다. 평소에 언론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저에게는 그만큼 많다는 것이지요.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동물들에 관하여”라는 책이 있습니다. 스웨덴의 수의사가 도축장에서 일한 경험을 기록한 것입니다. 아래는 그 책의 일부입니다.


친구나 지인에게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기 힘들다. 다들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한다. “너무해. 그런데도 거기서 일하고 싶어? 너무 일찍 일어난다.” 누군가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다 말해봐. 동물들 이야기 다 해줘.”

동물들 이야기를 다 하고 싶은 이 수의사의 마음이 저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동물을 사육하거나 잡아 돈을 벌고, 고기를 먹으며, 동물실험을 거쳐 만들어낸 약을 복용하고, 동물을 집지킴이로 이용하기도 하며, 동물과 함께 살면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삶의 곳곳에서 동물들을 이용하고 있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끼는 동물들의 삶에 대해서는 숙고해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알아야 할 만큼은 안다는 태도를 취합니다. 


물론 사람은 다분히 이기적이어서 동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도 숙고하지 않습니다. 지인이 어느날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그때서야 ‘사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웠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아도 생물분류 상 같은 사피엔스이고, 사회라는 지속적 협력체계의 같은 구성원으로서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동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며칠 낮밤을 이어 해도 시간이 모자랄 이야기입니다. 누가 이렇게 긴 시간 저의 이야기를 들으려 할까요? 요약을 하면 될까요? 요약이란 정보의 손실입니다. 원래 이야기가, 듣는 존재를 바닥에서부터 흔들어 놓을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요약된 이야기는 잠깐 듣고 잊어버리는 별 것 아닌 이야기가 되기 쉽습니다. 결국 저는 막상 언론인을 앞에 두고는 소통이 되지 않는 답답함을 느낄 뿐입니다. 이 글은 이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고 싶은 제 마음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저는 21세기에 사람의 손에서 나온 문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가 2015년 영국의 정론지 “더 가디언”에 기고한 칼럼에 있는 “공장식 축산은 아마 역사상 최악의 범죄일 것이다”라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한국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 가자지구에서 어떻게 정의와 평화를 실현할 것인가 등 사람들이 흔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공장식 축산이 역사상 최악의 범죄라는 말이 맞다면 공장식 축산을 중단시키기 위해 인류는 무엇보다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공장식 축산을 포함하여 인류가 동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만약 우리가 진지하고 이성적으로 토론을 지속한다면 저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계몽주의적 생각이, 각자의 가치관이 존중되는 다원주의의 시대에 가당할까요? 하지만 아무리 다원주의의 시대라고 해도 인권처럼 보편성을 가지는 가치가 있음을 생각해 보면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토론을 한다면 그 내용은 다음 세 단계로 구성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오늘날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방식이 동물의 입장에서 어떠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오늘날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방식이 사회 정의에 부합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세 번째는 만약 그것이 사회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의 중대성을 가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모두를 이 짧은 글에서 다룰 수는 없고, ‘동물의 삶’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입니다.


동물운동은 동물의 삶을 바꾸기 위한 사회운동입니다. 오늘날 동물운동은 동물구조와 생방송이란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물운동’에서는 동물운동이 왜 이러한 형태로 전개되는지 이야기할 것입니다. 



박대송 사건


박대송 사건은 한 마디로 피학대동물을 구조한 사건입니다. 견주는 자신의 집안에 살던 개를 파양하여 한겨울에 친척집 마당에 묶어두었습니다. 이것은 동물을 대상으로 정당한 사유 없이 불필요하거나 피할 수 있는 고통과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이며 동물보호법상 동물학대의 정의에 부합합니다. 동물보호법에서 “동물학대”란 동물을 대상으로 정당한 사유 없이 불필요하거나 피할 수 있는 고통과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 및 굶주림, 질병 등에 대하여 적절한 조치를 게을리하거나 방치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동물을 존중하는 반려인들의 눈에 박대송이 파양으로 겪은 고통과 스트레스는 몇 번의 매질보다 더 큽니다. 


그런데 견주는 자신의 SNS에 “진짜 내 생애 개라면 끔찍한 기억을 준 박대송 시바 우리 집에 지내면서 등따시고 행복한 줄 알아야지 이제 시골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시골개들처럼 묶여서 잘 지내렴 입질해서 된장 바르기 전에 시골 할머니 댁으로 보냄”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여기서 된장 바른다는 것은 개고기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견주는 박대송이 배뇨 문제가 심하고 입질이 있어 자신에게 ‘개라면 끔찍한 기억을 준’ 주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견주에게 끔찍한 기억을 줄 정도였다면 개 역시 끔찍한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고 지냈을 것입니다. 입양된 지 3년이 넘은 개가 여전히 배뇨 문제와 입질이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들의 잘못으로 생긴 문제를, 오히려 지금보다 더 안 좋은 환경으로 개를 보내는 방식으로 처리하면서, 개에게 악담을 퍼붓는 저 모습이 많은 분들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견주의 글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지고 엄청난 조회수가 올라갔으며 견주의 딸을 모델로 하고 있던 보험회사의 게시판에 항의의 글이 쏟아졌습니다.


이 상황은 구조의 요건을 다 갖춘 상황입니다. 유기나 다름없는 형태의 파양이 이루어져 개에게 매우 심한 고통과 스트레스를 안겨 준 상황이고 시민들의 높은 관심이 형성되어 구조할 힘이 생긴 상황입니다. 그래서 케어는 구조를 하기 위해 견주의 집으로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학대받은 동물을 구조하는 통상적 상황입니다. 그 다음에 지자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상황의 전개는 갈라지는데, 지자체가 동물보호라는 자신의 법적 책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 학대행위자를 계도하여 동물의 소유권을 포기하게 하고, 그렇지 않고 동물학대가 일어난 상황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말하게 되면 학대행위자는 기세가 등등해져 내가 뭘 잘못했느냐는 식으로 나오게 됩니다. 수성구청의 경우는 후자의 상황이었습니다.


구조 활동 중에, 개를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동물이 다쳤을 가능성이 있고 병원으로 옮겨 검사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도 수성구청은 육안으로 보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며 학대행위자의 편을 들었습니다. 시민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지자 결국 박대송은 병원으로 가게 되었고, 검사와 중성화수술, 마이크로칩 삽입이 있었습니다, 검사 결과 방광염 등의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병원을 나와서는 케어 활동가의 집으로 갔다가 현재는 케어의 입양센터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성구청은 박대송의 소유권을 양도받는 한편 수성경찰서에 사건을 수사의뢰합니다. 소유권 양수도 과정에, 경찰서에서 무혐의처분이 나오면 돌려주겠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건의 해결을 경찰에 의존하는 것은 지자체가 동물보호라는 자신의 책무를 벗어나기 위해 흔히 취하는 태도입니다.


한국에서 동물학대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식용 어류의 학대처럼 명시적으로 학대에서 제외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축산업에서의 학대처럼 공무원에게 적발을 위한 활동의 권한과 의무가 부과되지 않아 학대실정이 알려질 수 없는 경우도 많으며, 묶어 기르기나 파양과 같이 만연해서 그러하기도 합니다.


박대송과 같은 방식의 파양의 경우 동물에게는 매우 큰 고통과 스트레스를 주지만 형사처벌대상으로 보기 힘듭니다. 또한 박대송을 파양하면서 미안해하기는커녕 박대송을 조롱한 글을 올린 것은 동물보호법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생명 존중의 국민 정서’를 정면으로 훼손하는 행위지만 역시 형사처벌대상으로 보기 힘듭니다. 한국에서 수십년 동안 이루어진 피학대동물 구조의 다수는 형사처벌 대상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동물학대의 부당성과 동물보호의 정당성에 뒷받침된 동물운동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 MBC ‘실화탐사대’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담당 피디는 이 사건을 별 것 아닌 건을 동물운동이 키워서 전 견주를 사회적 곤란에 빠뜨린 사건으로 이해하면서, 케어는 전 견주에게 개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담당 피디는 증거력이 미약하거나 오염된 정보를 편집하여 본인의 이해와 입장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이 사건은 별 것 아닌 건이 아닙니다. 한 겨울에 마당에서 묶여 사는 삶으로 내쫗으면서 동물에게 매우 큰 고통과 스트레스를 주었고, 파양되는 동물을 조롱한 글을 올림으로써 생명 존중의 국민 정서를 훼손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탐사취재가 필요하지 않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박대송을 돌려주는 것이 맞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대다수가 돌려주어서는 안된다고 답한 사실도 국민 다수의 의견과 동떨어진 일부의 의견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담당 피디가 기각한 이 의견은 이 사건을 처음부터 봐서 누구보다 사건을 잘 이해하는 시민들 대부분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대신 해당 피디가 내세우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1) 전 견주로부터 받은 박대송이 잘 지내는 듯한 영상.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사람의 핸드폰에도 행복해 보이는 영상은 수없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애초에 잘 지냈다는 것을 영상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일주일 내내 박대송의 삶을 찍은 것이 아니라면. 2) 박대송이 병원에 내원한 적이 있음을 보여주는 신용카드 영수증 한 장. 반려동물을 방치하는 경우에도 사료를 사기 위해, 설사가 심해서, 기타 여러 가지 사유로 한번 병원을 방문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방치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개를 두 번이나 잃어버리고도 마이크로칩을 삽입하지 않고 중성화수술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3) 동물병원 원장이 박대송은 방광염이 아니라고 말한 사실. 이에 대해 저는 박대송을 검사한 동물병원의 내과과장이, 염증이 현저하게 존재하는 방광염이라고 진단하면서 방광염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외부기관에 배양검사를 의뢰할 것이라고 말했던 영상을 담당 피디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담당 피디는 박대송의 주치의는 내과과장이 아니고 원장이라는 병원측의 황당한 답변을 전달해 왔습니다. 내과과장이 수련의도 아니고, 방광염이 협진이 필요한 심오한 병도 아닌데, 검사하고 의뢰인에게 검사결과와 향후 조치에 대해 설명한 의사가 주치의가 아니라니요. 그런데도 피디는 병원측에서 주치의가 원장이라고 하니 원장이 주치의가 맞고 주치의가 방광염이 아니라고 했으니 방광염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내과과장도 현저한 방광염이 아니고 경미한 방광염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피디는 박대송의 배뇨장애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언론이 올바른 취재를 하는 것이라면, 병원 측의 이런 해명은 판단을 따라야 할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파해쳐야 할 취재의 대상일 것입니다. 4) 수성구청 동물복지위원회에서 박대송을 전 견주에게 돌려주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 조직의 내부인과 외부인으로 구성된 각종 위원회가 외부 전문가의 판단을 반영하고자 하는 원래의 취지가 아닌 조직의 의사대로 운영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담당 피디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동물관련 위원회 중 가장 많은 것이 아마, 동물실험기관마다 구성되어 있는 동물실험윤리위원회일 것인데 이들 중 동물실험기관에서 행해지는 잔혹한 동물실험을 저지하는 곳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언론이 올바른 취재를 하는 것이라면 동물복지위원회의 저 결론은 판단을 따라야 할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파헤쳐야 할 취재의 대상일 것입니다. 저는 수성구청에 관련 회의록을 정보공개청구해 둔 상태입니다.


정리하면, 담당 피디는 대송이가 전 견주로부터 사랑과 보호를 잘 받고 있었으며 대송이를 전 견주에게 돌려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취재과정에서 저에게 말한 어떤 근거도 그의 말을 정당화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 사건 관련하여 객관적이고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견주가 박대송이 배뇨 문제가 심하고 입질이 있어 자신에게 ‘개라면 끔찍한 기억을 준’ 주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 견주에게 끔찍한 기억을 줄 정도였다면 개 역시 끔찍한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고 지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객관적이고 더 중요한 사실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안 좋은 환경으로 개를 파양하였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반려인들의 가슴에 칼이 되는 동물혐오글을 게시하였다는 것입니다. 


담당 피디는 전 견주가 처한 사회적 곤란에 주목합니다. 케어가 이 사건을 키우지 않았다면 마치 그가 사회적 곤란에 처하지 않았을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케어가 전 견주의 집을 찾아 간 것은 1월 15일인데 그 전에 본인이 SNS에 직접 글을 쓰고 딸 얼굴과 아파트까지 올림으로 인해 사건과 신상정보까지 인터넷 커뮤니티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시민들의 항의로 견주의 딸을 모델로 하던 보험회사는 해당 광고를 이미 내린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사회적 곤란에 처하는 것은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래서 전 견주를 만났을 때 긴 시간 그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고 문자 메시지로도 도움을 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해 ‘명백하고 흔한 동물학대 및 그와 결합된 혐오언어’라는 취지로 늘 말을 하였습니다. ‘흔한’을 굳이 언급하였던 것은 한편으로는 사실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대행위자가 너무 구석으로 몰리길 원치 않아서입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의 이런 태도가 박대송의 전 견주나 담당 피디가 박대송의 파양을 흔히 있을 수 있는 별 것 아닌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된 한 빌미를 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기본적 인식이 동물을 공정하게 보지 못하고 현저히 치우쳐 있는데 그것을 공정한 위치로 옮기려면 반대쪽으로 힘을 주어야 합니다. ‘흔한’은 사안의 해석으로서는 맞다고 해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천가의 언어로서는 부적합했습니다. 


박대송의 파양과정을 보면 박대송의 전 견주가 반성하고 앞으로는 박대송을 잘 돌볼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동물의 삶과 고통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숙고해 본다면 그런 위험을 감수하자는 결론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법적으로 돌려줄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합니다. 법은 도덕적 옳음이 아니지만 필연이기는 합니다. 법에 복종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박대송이 다른 곳으로 입양가는 것이 박대송을 위한 길이고 그것이 동물을 존중하는 도덕적 옳음임을 계속 설득하면서 법적 과정을 충실히 따라갈 것입니다.



동물의 삶에 대해


박대송 사건의 바탕에는 우리가 동물의 삶과 그들이 겪는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매년 축사 화재로 엄청나게 많은 돼지들이 죽습니다. 


“충남 아산 돈사서 화재…새끼돼지 450마리 폐사”(3월 22일)

“제주 양돈장 화재로 돼지 10여마리 폐사…인명피혜 없어(3월 18일)

“화성 정남면 돈사서 불…돼지 3천마리 폐사”(3월 14일)

“함평 돈사서 불…돼지 4000여 마리 폐사 추정(3월 7일)

지난 달 언론에 보도된 내용만 저 정도이므로 1년에 돈사에 갇혀 살다가 화재로 죽는 돼지는 수만 명은 될 것입니다. 인간만이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정당화하기 힘든 발상이 아니라면 매년 수만 개의 몸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발생하는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언론에서 이 문제는 ”돈사 385㎡가 타고 새끼돼지 450마리가 죽어 소방서 추산 4천100만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는 식으로 다루어집니다. 4천100만원 이상의 재산 피해를 입히는 사건은 수도 없이 많고 그리하여 이 사건은 별 것 아닌 사건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돼지의 죽음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입니다.


언론은 기사에 채워 넣을,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에 늘 목말라합니다. 385, 450, 4천100만 같은 숫자는 그런 조건에 맞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이 사건을 전체적 관점에서 합당하게 다루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돈사 화재 사건에서 돼지의 고통이라는 중요하나 뻔한 사실은 기사 분량을 채우는데 참여하지 못하고 사건은 완전히 왜곡되게 됩니다.


언론이 이처럼 자기 방식에 빠져 부당한 현실의 유지에 큰 몫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 유지의 책임이 언론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돼지의 저 고통스럽고 부당한 죽음이 문제시 되지 않는 것은 돼지가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동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동물보호소에서 보호하고 있는 돼지인 ‘조나단 리빙스턴’의 이사가 있었습니다. 트럭에 조나단을 싣는데 7명이 달라붙어 거의 여섯 시간이 걸렸습니다. 작업자들의 서툶이 큰 원인이긴 했지만 무거운 돼지를 경사로를 따라 올리는 일이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양돈장에서 도살장으로 출하되는 돼지는 어떻게 간단히 이동할 수 있는가. 그것은 전기봉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전기충격을 겪은 돼지는 비명을 지르지만 작업자들에게는 어차피 죽을 놈, 빨리 처리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언론, 혹은 돼지를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만이 돼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돼지를 먹는 대부분의 국민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에 도축된 돼지는 1천9백만 마리가 넘습니다. 2015년부터 매년 그 숫자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개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번 경북 산불로 많은 개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안동의 한 개농장에서는 철장에 갇힌 채 700마리가 불에 타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케어는 이 개농장 인근에서, 산불에 타던 개농장 탈출 후 서로 곁에서 지키며 10일간을 굶고 있는 어린 도사견들을 발견했습니다. 케어가 도착했을 때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이 개들은 벌벌 떨며 서로의 몸을 포갠 채 바짝 엎드려 있었습니다. 한 명은 얼굴의 형체가 사라질 정도로 불에 탔고 다른 친구는 자신의 몸으로 불에 탄 그 친구를 감씨주고 있었습니다. 


묶여 사는 집지킴이 개들도 이번 산불로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특히 쇠사슬로 묶여 있던 개들은 줄이 끊어지지 않아 꼼짝 못하고 죽었습니다. 화재로 개가 타죽거나 심한 화상을 입은 것을 매체를 통해 본 사람들은 주인이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가면서 줄을 풀어주지 않은 것에 심하게 분개를 합니다. 그런데 자신과 가족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개 줄을 풀어줄 정도의 사람이라면 애초에 개를 묶어서 길렀을까요? 흔히 보는 묶어 기르기에 이미 재난 상황에서의 희생 가능성이 배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개를 묶어 기르는 것은 그 자체로 동물학대입니다. 개를 묶어 기르는 것은 동물을 대상으로 정당한 사유 없이 불필요하거나 피할 수 있는 고통과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개로 태어났는데 묶여져 산다고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개를 묶어 두는 것은 여러 주에서 처벌대상입니다. 캘리포니아와 하와이에서는 개를 개집, 나무, 울타리 또는 기타 고정된 물체에 묶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매사추세츠에서는 24시간 중 5시간을 초과하여 개를 묶어 두어서는 안 되며,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야외에서 개를 묶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네바다에서는 24시간 중 10시간을 초과하여 개를 묶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뉴저지에서는 밤 11시부처 아침 5시까지 야외에서 개를 묶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집안에 사는 개들의 형편은 묶여 사는 개들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수가 애완동물로 취급되고 있고 소유주가 불편을 느낀다면 천덕꾸러기가 되거나 학대를 받게 되고 더 심하면 유기동물로 전락하게 됩니다.


동물을 존중하는 사람은 정말 적습니다. 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대부분은 반려동물을 사랑할 뿐입니다. 또한 반려동물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애완동물로서 이뻐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지, 반려동물의 입장에서 그들이 필요한 것을 잘 살피고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반려동물 존중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습니다. 도대체 이런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동물운동에 대해


동물보호법은 스스로의 목적으로서 첫째, 생명 존중의 국민 정서를 기르고, 둘째, 사람과 동물의 조화로운 공존에 이바지함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과 동물의 조화로운 공존이라는 목적은 다분히 장식적인 표현입니다. 동물보호법의 내용을 살펴보면 동물보호법은 다른 법률이 다 그러한 것처럼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사회질서에서 동물의 처지는 지옥에 내던져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동물보호법이 말하는 공존이란 인간과 동물 상호간의 존중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착취가 지속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동물보호법의 목적 중 동물운동의 관점에서 유의미한 것은 ‘생명 존중의 국민 정서를 기르고’라는 부분입니다. 동물존중 사회를 만드는 것은 동물운동을 하는 이들이 국민에게 강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우여곡절을 겪든 궁극적으로는 국민이 그러한 선택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밑바탕에는 ‘정서’가 있습니다. 철학자 랑시에르는 ‘정의는 감성적인 것의 배분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동물을 향해 자신의 좋은 감정을 내어놓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고서는 동물을 위한 정의나 동물존중 같은 것은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이상의 이야기를 전제로 오늘날 동물운동이 왜 동물학대 현장에서의 유튜브 생방송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유튜브 생방송은 진행자가 시민을 향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영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동물운동에서 유튜브 생방송은 그것을 훨씬 뛰어 넘어 사건 해결을 위한 정보를 탐색하고 공유하며 시민들의 의사를 조직하고 시민들을 사건해결에 즉각적으로 참여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유튜브 생방송은 다양한 사람들이 시청합니다. 이 중에는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사람, 공무원, 언론인, 학대현장 가까이 사는 주민, 학대행위에 대해 아는 사람, 자차를 소유하고 동물을 이동할 수 있는 사람, 민원 넣는 것에 익숙한 사람도 있습니다. 유튜브 생방송은 동물운동가와 이런 시민이 함께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동물운동가가 생방송도 안 켜고 고립된 채 사건현장에 뛰어든다면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동물운동에서 하나의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건 해결 대신 동물의 삶과 동물윤리에 대해 책을 쓰고 시민들을 모아서 교육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동물이 삶과 죽음의 전 과정에서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이 공리주의, 칸트철학, 아리스토텔레스철학, 신유물론에 비추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도 현실에 끼치는 영향은 없고 동물운동가와 시민의 머릿속만 복잡해 집니다.


동물운동은 이와 같이 하는 대신 동물학대사건에 개입하여 시민과 함께 그 동물을 구조합니다. 그 동물을 구조한다고 해서 전체 동물을 억압하는 이 체제에 어떤 타격을 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학대로부터 구조할 수 있는 동물을 그대로 두면서 동물 존중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강한 마음의 소유자는 드뭅니다. 동물 구조는 그 동물에게 고통을 끝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일 뿐 아니라 동물 존중의 정신이 명맥을 이어가게 하는 징검다리입니다. 또한 시민은 실천에 참여함으로써 생명 존중 정서로 확실히 변화하게 됩니다.


그런데 동물운동이 구조할 수 있는 동물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대규모 양돈장이나 양계장의 동물을 구조할 수 없고 대규모 개농장의 개도 구조할 수 없습니다. 물론 피학대동물이 아닌 유기동물 등을 구조할 수도 있지만 이는 동물운동의 주된 관심대상은 아닙니다. 이리하여 동물운동은 자신이 구조할 수 있는 학대사건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든 구조를 하고자 합니다.



맺음말


우리는 동물의 삶과 그들의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묶어 기르는 것이나 파양하는 것이 동물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스트레스를 초래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동물보호법상 학대 정의에 의할 때 우리 주변은 동물들의 학대로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대부분의 행위는 형사처벌되지 않고 있습니다. 식용 어류의 학대처럼 명시적으로 학대에서 제외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축산업에서의 학대처럼 공무원에게 적발을 위한 활동의 권한과 의무가 부과되지 않아 학대실정이 알려질 수 없는 경우도 많으며, 묶어 기르기나 파양과 같이 만연해서 그러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수십년 동안 이루어진 피학대동물 구조의 다수는 형사처벌 대상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동물학대의 부당성과 동물보호의 정당성에 뒷받침된 동물운동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동물운동은 학대받는 동물을 구조하기 위하여 유튜브 생방송을 이용하여 시민들의 의사와 행동을 조직하는 것을 주된 형태로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동물 존중의 정신이 명맥을 이어가게 하는 징검다리이고, 시민은 실천에 참여함으로써 생명 존중 정서로 확실히 변화하게 됩니다.


박대송 사건은 집안에 살던 개를 한겨울에 마당의 묶여 사는 삶으로 내몬 동물학대사건입니다. 견주는 자신이 기르던 개에 대한 혐오언어를 자랑인냥 온라인에 게시하였습니다. 이 사건에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여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나르고 견주의 딸이 모델로 있던 보험회사의 광고를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동물운동은 이러한 시민의 분노와 행동에 응답하여 박대송을 구조하였습니다. 이것이 박대송 사건의 본질입니다. 견주가 박대송을 때렸느냐, 박대송의 방광염이 얼마나 심하냐라는 논란이 구조활동이 시작되고 있었으나, 이는 지엽적인 문제입니다. ‘실화탐사대’는 탐사프로그램이 빠지기 쉽고 위험한 오류인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보는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이 나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잘 아는 시민들의 눈에는 너무나 명백한 숲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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