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운동 칼럼> - 낭만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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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은 도계장 앞
<동물운동 칼럼> - 낭만에 대하여 -
다른 사회운동에서 동물운동으로 왔을 때 가장 놀라왔던 것은 ‘투쟁’이라는 말이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 동물자유연대의 돈을 보고 “80억원이 넘는 정도의 돈이면 동물운동도 이제 축산업에서의 학대 반대 투쟁을 본격화 해야 한다. 양계장과 양돈장, 도축장에 언더커버 활동가를 침투시키고 그 영상으로 광고를 적극 전개하여야 한다. 그에 기반하여 시민행동을 조직하고 축산시설로, 국회로, 농림부로 진군하여야 한다”는 글을 올렸더니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투쟁, 침투, 조직, 진군... 거부감이 확 느껴지는 단어들.”
인간이 곰팡이보다 특별한 거 같아도 생존과 번식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투쟁, 침투, 진군 같은 말은 생존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조직은 자유로움을 억누르는, 번식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투쟁, 침투, 조직, 진군 같은 말을 싫어하고 그러한 행위도 싫어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 거대하고 끔직한 동물학대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투쟁, 침투, 조직, 진군을 하지 않고 ‘기분 좋은 말’로 없어질 동물학대 산업은 없다. 경제구조는 당신의 낭만보다 훨씬 강고하다.
1822년 영국에서 최초의 근대적 동물보호법이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동물보호법은 전 세계적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공장식 축산과 동물실험 등 동물학대는 더욱 더 심해졌다. 그러다가 1975년 동물운동의 바이블이라고 하는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이 출간되었다. “동물해방”은 무엇이 특별하여 돔물운동의 바이블이라고 불리고 있는가?
1822년의 동물보호법은 당시 시대 사조였던 낭만주의의 산물이었다. 그 후 150년간 사람이 동물을 보호하는 태도는 낭만주의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낭만주의는 이성보다 인간 감정을 중시하는 사조로서, 낭만주의 동물보호에서는 동물학대가 가져오는 인간 감정의 훼손이 중심적인 문제다. 이런 소박한 인간중심주의는 강고한 인간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경제 행위(공장식 축산과 동물실험) 앞에서 무력하다.
“동물해방”은 이 몸에서 발생하는 쾌고가 저 몸에서 발생하는 쾌고보다 결코 더 중요하지 않다는 이성적 판단을 원리로 한다. 이 원리는 인간의 감정이 중요하다면, 동물이 인간의 감정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포함한다. 이제 동물운동가가 인간의 경제 행위와도 싸울 수 있는 언어를 얻게 되었다.
한국의 동물운동은 이기적인 인간 감정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 동물단체에 후원하는 사람들의 다수가 극단적 고통의 산물인 회와 닭을 먹으면서 인간 감정에 친숙한 개의 안락사에는 반대하는 반이성적 종차별주의를 나타내고 있고 동물단체의 대표라는 사람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동물단체는 동물의 자유니 동물의 권리니 하는 간판을 내걸었기 때문에 어류나 닭을 위하는 시늉을 한다. 학대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언어로. 공론화가 두려워 물밑에서. 공개적 투쟁을 앞장세우지 않는 해방운동은 억압을 유지시키는 자기기만에 불과함을, 오랜 사회운동의 역사가 똑똑히 보여준다.
동물을 고통에서 해방하는 투쟁은 혼자서 할 수 없다. 싸우는 대상이 강고한 경제구조이기 때문이다. 각 동물단체가 각자의 방식대로 알아서 활동하자고 말한다면 그는 동물학대를 방조하는 사람이다. 명색이 동물단체라면 강철같이 단결하여야 한다.
단결은 하나의 목표를 정해서 체계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단체가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체계를 세우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그것은 치열한 토론을 필요로 한다. 이 토론은 사상투쟁을 필수적 구성부분으로 한다. 동물운동가도 동물학대를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의 산물로서 나쁜 동물관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생존과 번식의 욕망 및 그것의 사회적 표현인 재물욕망과 인정욕망을 동물운동에 앞세우기 쉽기 때문에 이런 사상을 제압하지 않고는 동물해방을 위한 단결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단체들끼리 싸우는 것과 단결하는 것은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 문제는 싸움의 내용이 사상투쟁이냐 아니면 “쟤 나빠요, 쟤 싫어요”냐다. 후자는 분열을 위한 불화이고 전자는 단결을 위한 불화다. 예수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아느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했다. 동물학대를 방치하는 가짜 평화가 아닌 진실된 평화는 우리 내부와 외부를 향한 투쟁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오직 투쟁, 오직 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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