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운동 칼럼> - 기억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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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운동 칼럼>
- 기억 하나 -
몇 달 전 카카오 같이가치에 모금 제안서를 보냈다. ‘동물운동가 양성 프로젝트’로 7천2백만원을 카카오 같이가치 플래폼을 이용하여 모금하자는 것이었다. 케어의 활동량에 비해 케어 플래폼이 너무 작아서이다.
제안서 심사 절차는 관련 기관에서 진행했는데, 만약 모금이 100만원밖에 안된다면 뭘 할 거냐는 질문을 했다. 나는 동물운동가가 활동하다 지칠 때 그를 위로해 줄 예수나 전태일의 동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내용은 모금대상이 될 수 없다는 회신이 왔다.
동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조는 사회의 경제구조와 법, 시민의식에 널리, 단단히 자리잡고 있어서 그것을 실제로 바꾸기 위해서는 동물의 이익을 위해 진실되고 간절한 사회운동가가 요구된다. 이런 사회운동가는 흔히 보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아니고 흔히 보는 ‘시민단체 활동가’도 아니다. 사회와 불화하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아니라 비난이나 비웃음을 받으며, 여러 사회적 위험에 놓이는 사람이다. 예수나 전태일 같은 사람이 그 전형이다.
대형 기부 플래폼과 연계되어 일하는 배분심사 실무자가 예수와 전태일로부터 종교와 정치를 떠올리는 것은 사실 놀랍지 않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진 사람이라면 응당 예수와 전태일로부터 ‘나를 버림’을 떠올리겠지만 그런 깊이의 연민을 가진 사람은 매우 희소할 수밖에 없다. 보통의 사람들이 가지는 연민이란 거울뉴런을 가진 동물이 다른 동물의 고통에 반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며 그런 점에서 예수와 전태일을 보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기부 플래폼에 들이미는 것은 좋은 분위기를 망치는 일이다. 놀랍지는 않지만, 정치라는 터무니 없는 명목으로 전태일을 배제하는 것은 가슴을 찌르는 통증을 주기는 하였다. 물론 동물운동가 양성 프로젝트 자체가 기각되었다.
여기서 ‘물론’이라고 말을 한 것은 처음부터 예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동물운동가란 예수나 전태일을 모범으로 삼는 사람이다. 죄없이 고통을 겪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나를 버리는 사람이다. 케어가 너무 돈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등을 떠밀어 제안서를 낸 것이지 대형 기부 플래폼에는 환영받을 수 없는 프로젝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깊은 연민은 현장성과 비타협성으로 나타난다. 케어의 정신은 “위기의 동물 곁에 케어가 있습니다”, “동물을 앞에 두고 타협하지 않습니다”라는 두 개의 문장으로 요약된다. 케어의 활동가는 실제로 이 정신으로 숨을 쉬고 행동하고 있다. 동물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동물을 위한 현장성과 비타협성은 인간성을 존엄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기본 중의 기본인 윤리다. 그러나 케어 밖에서는 거의 찾기 힘든 윤리이다.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진영도 전혀 다르지 않다. 심지어 동물의 편임을 표방하는 진보조차도 그러하고, 오히려 동물운동을 오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위선을 이야기하는 것이 지겹다. 또 단지 어리석음과 위선이라면 나 역시 다를 바 없다. 어차피 인간도 다른 생물처럼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게 진화되어 왔을 뿐이고,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도 생존과 번식을 위해 다른 동물의 의식처럼 예측하고 오차를 처리하는 과정일 뿐이며, 진실추구와 이타성은 우리의 본성이 아니다. 또한 노래말로도 표현된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그을린 그 시간들”을 어떻게 생존이니 번식이니 하는 말로 가벼이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하필 어리석음과 위선이 다른 동물을 향함으로써, 헤아릴 수 없는 동물에게 고통과 죽임을 가하는 결과를 낳고 있단 말인가.
케어라는 플래폼에 모인 사람들은 비록 소수지만 케어 정신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 밝은 시민들이다. 새삼 감사하다.
돈 구하러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떠오른 기억이다. 모금용 전단지 만들어 홍대앞이라도 가야겠다.
케어 회원이 되어 진짜 동물운동을 함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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